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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 한경직 ] 에 대한 검색결과 입니다.

검색결과 11

故 한경직 목사, “예수님의 사랑을 닮아야…”

[앵커]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한 유일한 한국인, 목회자가 있습니다. 이번 주는 한경직 목사 24주기를 추모하는 기념주간입니다. 청빈하고 겸손한 생전 모습으로 존경받는 목회자가 남긴 믿음의 유산을 돌아봅니다. 김혜인 기자가 보도합니다. [기자]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한 유일한 한국인. 한경직 목사는 1992년 인류애와 종교적 성취가 뛰어난 인물에게 시상하는 템플턴상 시상식에서 받은 102만 달러의 상금을 그 자리에서 북한 돕기 성금으로 기탁했습니다.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일제강점기 당시 신사참배 한 죄를 공개적으로 회개한 첫번째 목회자입니다. 한경직 목사 24주기를 추모하며 ‘그 사랑에 빚진 자’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열렸습니다. 전시회는 신사참배 거부로 자진 폐교를 결정한 숭실대학교의 재건에 앞장서고 청빈하고 겸손한 사회운동가였던 고 한경직 목사의 생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. 그는 평생 예수님의 흔적을 좇았던 목회자입니다.[ 故 한경직 목사 / 영락교회 : 인간의 가장 보람 있는 삶이 어떤 삶일까요? 이렇게 물어요. ‘아무래도 보람 있는 삶은 그 삶이 깨끗해야 될 것이다’ 그 생각이 먼저 나요. 보람 있는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살 때에 가장 남을 봉사하는 생활을 한 사람이 될 거예요. ]그가 세상을 떠난 지 2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의 유산을 이어가고자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. 한 목사가 설립한 영락교회 목회자와 성도 150여 명이 19일 추도예배를 드리기 위해 남양주 공원묘역에 모였습니다. 은퇴 장로들은 땅의 것에 집착하지 않던 한 목사를 기억했습니다. [ 박광준 은퇴장로 / 영락교회 : (한 목사님은) 육신적으로는 매우 연약했습니다. 집 한 채 통장 하나 갖지 못하였습니다. 목사님은 항상 나는 죄인이라 말씀하셨습니다.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사역, 교육사역, 복지사역, 교회연합 사역 등 여러가지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. ]영락교회 김운성 위임목사는 “하늘에 있는 걸 사모하고 한 평생을 불사른 그 신앙과 삶을 배우자”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. 그러면서 한경직 목사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‘사랑’이라고 전했습니다. [ 김운성 위임목사 / 영락교회 :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불쌍한 사람, 이웃을 사랑하는 거죠. 그 사랑이 그 시대에 응답하는 방식이었고 목사님이 오늘 사신다면 오늘에 맞는 응답을 하셨을 거 같아요. 숙제는 이제 우리들의 몫이죠. ]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는 올해의 ‘한경직상’ 수상자를 송광옥 인도네시아 파송 선교사로 선정, 상금 5,000만원을 수여했습니다. ‘2024 한경직 목사 기념주간’ 행사는 오는27일까지 영락교회에서 진행합니다. GOODTV NEWS 김혜인입니다.

2024-04-22

한국의 오순절 운동…한국교회 성장을 이끌다

[앵커]내달 대한민국 서울에서 오순절교단의 최대 축제 ‘세계오순절대회’가 열립니다. 오순절 운동은 전 세계 교회에 부흥을 이끌었습니다. 한국 기독교 역사에도 '오순절 신앙'이 끼친 영향은 상당한데요. 우리나라 오순절 운동의 역사를 살펴봅니다. 김효미 기자가 보도합니다.[기자]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한국 기독교 대부흥의 역사를 쓴 오순절 운동. 이 오순절 운동은 20세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06년 미국의 로스엔젤레스 아주사 거리의 허름한 건물에서 시작됐습니다. 아주사에서 시작된 오순절 성령운동은 100년 만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가 약 6억 명의 성도를 지닌 기독교 부흥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.아주사 부흥회에서 메리럼시 선교사는 예배 중에 성령 충만을 받고 1928년 한국에 들어오면서 오순절 신학도 시작됐습니다. 그 당시 한국은 일제강점기에 있어 교회가 큰 수난을 겪고 있었지만 메리럼시 선교사의 간절한 기도와 전도로 1932년 한국 최초 오순절교회인 서빙고교회가 설립될 수 있었습니다.1950년, 제1회 대한기독교오순절 대회가 개최되면서 본격적인 오순절 신학이 시작됐습니다. 6.25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, 미국 하나님의성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대거 한국에 들어오게 됐고1953년 박성산 목사 주도 하에 서울 남부교회에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가 창립됐습니다. 또 교단 신학교인 순복음신학교가 개교해 우리나라 오순절 운동을 이끈 신학자들을 배출했습니다. 여의도순복음교회 설립자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목사도 이곳 졸업생입니다.[ 조용기 목사 / 여의도순복음교회 : 저는 1958년도에 신학을 졸업하고 목회를 시작했습니다. 그때 저도 올 데, 갈 데 없어서 천막하나 치고 대재마을 불광동(現 대조동)에 남의 허락도 안받고 천막을 쳤습니다. 24인용 천막을 치고 가마니를 깔고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는데… ]오순절 운동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60~80년에는 조용기, 박정근 목사 주도로 오순절 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뤘고, 각 교회마다 대중 전도 집회가 활성화됐습니다. 1970년대에는 대중 전도집회가 많이 열렸습니다. 1973년 여의도 전도집회에서는 한국교회 성도 300만명이 운집했습니다.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3천만명일때의 일입니다. 전체인구 1/10이 집회에 참석했던 겁니다. 한경직 목사를 당회장으로, 빌리 그레함 목사가 주 강사로 나서 17개교단이 연합한 초교파 대형 전도대회였습니다. 이 집회를 통해 16,703명이 결신하기도 했습니다. 1974년 엑스플로 대회, 1977년 민족복음화대회, 1980년 세계복음화대회를 통해 오순절운동은 대중화됐습니다.그리고 현재까지 오순절 교인은 전 세계 기독교인의 25퍼센트가 넘는 비율로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.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담임목사는 "우리 한국교회는 기본으로 돌아가 성령 충만함으로 이 역사에 동참해야 한다"며 성령의 역사가 오순절대회를 통해 재현되길 기대한다"고 강조했습니다. GOODTV NEWS 김효밉니다.

2022-09-29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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